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닌의 난 (문단 편집) === 폭풍 전야 === 고료 전투 이후, 카츠모토는 시코쿠등 자신의 편에 선 9개 지역(쿠니)의 병력을 교토로 소환해 긴장감을 드높였다. 한편 고료의 전투로 교토가 난리통이 되어서 좋지 않다는 이유로 3월 5일에 연호가 분쇼에서 오닌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카츠모토파 군사들이 야마나파의 군사들을 공격해 연공미를 약탈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아시카가 요시미가 조정을 시도했다. 교토에서는 호소카와 쪽 병사들이 각지의 다리를 불태우고 4개 문을 닫았다. 5월에는 카츠모토 파인 전 하리마 슈고였던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하리마로 침입해 이를 탈환했다. 또한 타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와카사에 있던 잇시키 가의 영지로 쳐들어가고, 시바 요시토시는 에치젠을 침공했다. 미노의 토키 기문 일족인 토키 마사야스도 잇시키 가문의 영지였던 이세를 침공했다. 5월 26일에는 무로마치의 서쪽에 있었던 잇시키 요시나오 저택의 정실방(正実坊)을 쇼신인 코센이, 실상원(実相院)을 타케다 노부카타가 점령하고, 노부유키와 시게유키의 군사들이 저택을 습격하여 요시나오는 습격 직전에 탈출하고 저택이 불타는 것으로 교토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숨어있었던 마사나가를 포함해 전국의 동맹자들을 호출하는 한편, 무로마치를 전화에서 지킨다는 명목으로 쇼군 일행을 확보하고, 자신의 저택에 본진을 차렸다. 무로마치를 탈환한 카츠모토파는 서군쪽에 섰던 막부봉행중의 책임을 추궁했고, 6월 11일에 온쇼를 관할하던 이노오 스루카즈(飯尾為数)가 살해당하고 8월에는 만도코로 (政所) 집사 대리였던 이세 사다후지가 추방되었다. 소젠은 5월 20일에 평정을 열고, 이츠츠지 거리 대동궁(大東宮)에 진을 쳤다. 서군은 관령 시바 요시카도의 관령명령장에 의한 지령을 수행했다. 양쪽 군의 위치관계에서 따서 호소카와 측이 동군, 야마나 쪽을 서군으로 칭하게 되었다. 오닌기에 따르면 동군이 16만, 서군이 11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나,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교토에 집합한 장수들은 호쿠리쿠, 신에츠, 토카이와 큐슈의 치쿠젠, 분고, 부젠 지역이 대다수였다. 지리적으로는 호소카와 일족이 키나이와 시코쿠의 슈고를 맡고 있었던데다가 그 근처 지역에도 자신들의 세력인 슈고를 배치했었던지라 동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서군은 야마나를 시작으로 호소카와와 그 동맹세력의 대두를 경계하던 지방세력들이 가세했다. 그래서 서군은 쇼군 요시마사의 측근이면서도 타케다 노부카타와의 갈등 때문에 가담한 잇시키 요시나오라든지, 롯카쿠 타카요리나 토키 시게요리 같이 상황에 따라 가담한 자들도 많아 통솔에 불안이 남아있었다. 한편, [[간토]]나 [[도호쿠]], [[규슈]] 남부 등의 지역은 이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지역내 유력 무사 가문들이 대규모 분쟁을 일으켜, 중앙에서의 분쟁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전란상태에 돌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